그루터기 Open Talking

5과: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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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소중한 선물이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여라. 그리고 이제 클라이맥스로 들어갑니다.

 "복음을 믿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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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질문 162쪽) 마가는 마가복음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왜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또렷한 갈매기살

질문 p.165
복음을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으로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배와 설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앙칼진 양말짝

질문 (172 페이지) 예수님이 왜 몸값을 치러야 하셨을까요? 또 그 방법이 왜 죽음이어야만 했을까요?

과몰입한 원자력발전소

질문 161, 165쪽 등) 소중하게 전달한 선물은 받는 사람이 소중하다고 느껴야 비로소 소중한 선물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받는 사람이 소중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선물이 아닐테니깐요)
그럼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물은 어떻게 해야 소중하게 받을 수 있을까요?

매끈한 삼각플라스크

▸기타 의견

기타 의견 <우리에게 예수가 복음인 두 번째 이유> 부분에서 나온 성경구절 "골로새서 1장 28-29절 여기서
"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 나도 ...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 라는 구절이 와닿았습니다.

주변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에 제 성격과 제 노력, 힘만으로 하려는 경향이 큰 것 같은데 이런 말씀구절을 읽고 들을 때마다 성령님에게 기도드림을 평소에 습관화하여 힘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뽀얀 민트초코프라푸치노

▸기도제목

기도제목 내일 설교문을 그대로 올려드립니다. 잘 읽어보시고, 내일 함께 토론하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믿는 복음(롬 1:16-17)
2025년 12월 14일(비산동교회 청년예배)

16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 입니다.
17절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서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에 이르게 하는데,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부터 살리라고 하였습니다”(사역. 私譯)

I. 서론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우리의 믿음의 핵심내용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루터는 성경이 금반지라면 로마서는 그 금반지의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석의 정 중앙에 박힌 다이아가 바로 이 1장 16-17절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당연히 하나님과 우리 구주되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될 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또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듣지 않는다면, 아예 믿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믿는다 해도 그저 막연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 단계로 들어가면 뭔가 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여기서 좀 자신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그 무엇을 믿는가? 무엇을 믿는지 대충은 알겠는데, 사실은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내용을 복음이라고 합시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행하신 그 무엇이지요. 그러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인들은 복음을 ‘예수를 믿어 나의 죄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래서 영생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대체로 틀리지 않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뭔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에서 아직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복음의 위력을 에둘러서 강조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이기에 그런 능력이라는 말입니까?

II. 본론: 하나님의 의

1. 믿음과 삶의 변화

바울은 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막연히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그런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어떤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가를 설명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성서 하박국 2:4을 인용하며 서론을 마무리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믿음은 신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식의 그런 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엄청난 실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삶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정말 얼마나 많은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믿는다고 겉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인이 흑인되거나, 여자가 남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한국인은 한국인으로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을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과 언약 밖에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부름 받을 때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이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즉, 첫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요 그리고 언약을 받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언약백성이란 곧 이스라엘인을 말하는데, 그래서 복음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는 복음의 믿는다고 말할 때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건너뛰고 그냥 ‘예수를 믿음’으로 직행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라면 ‘오직 예수!’라는 구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의 구호로 우리는 예수님을 무슨 ‘구원의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믿음을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에게로 펄쩍 달라붙는 무슨 ‘순간접착제’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왜 복음이 이런 경박한 믿음에 결합됩니까?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의와 신실함의 관계
무슨 말입니까? 17절에서 바울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어지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여기서 믿음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피스티스’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거의 믿음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지만 사실은 영어로는 belief와 faith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belief란 신의 존재를 ‘믿음’이라는 뜻이라면, faith(fulness)란 ‘신실함’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말외에도 신실함이나, 심지어 충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롬 3:3을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피스티스)을 폐하겠느냐?” 이번엔 성령의 열매를 나열하고 있는 갈 5:22: “충성(피스티스)”
그러니까 믿음이란 문장의 뜻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 것인데, 이 문장 “믿음으로부터 믿음에”라는 표현은 앞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연관된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에’라고 뜻을 새겨 번역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제가 찾아보니 일찍이 20세기 신학의 거대한 산과 같은, 칼 바르트를 비롯해 상당수의 학자들이 이런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요한복음을 통해서 설명하면, 복음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가 영생, 곧 구원을 얻는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 있다고 합니까? 여기서 도대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기에 신실함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의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은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역사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함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야기가 구약의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한 백성,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하시는 일을 감행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의 선택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이 은혜로운 선택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와 믿음의 응답으로 체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란, 이스라엘이라도 죄악은 반드시 심판하시고 의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 곧 공의이기도 합니다.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은 세계를 구원할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며,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언약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과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와 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약속을 배반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해서라도 세상구원의 약속을 지켜나가십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북왕조에 이어 다윗왕조까지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과 공의로 신실하게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고 구원하여 마침내 창조를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세계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나가십니다. 하지만 이번엔 새언약을 통해서 그 계획을 진전시켜 나가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새롭지만, 이제 마지막 국면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바로 이 소식이었습니다.
무엇이 새롭다는 말입니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언약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즉, 옛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졌다면,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는 모든 자가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 복음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III. 맺는 말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있습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를 온전히 구원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그 신실하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삶을 이미 구원하셨고, 장차 완전하게 구원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럼 하나님의 다스림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 않에 있는 내 삶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지키시고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런 나와 우리의 주님은 이 세계를 온전히 다스려, 마침내 나와 우리,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마침내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박정수목사

기도제목 내일 예배전 1시 30분부터 모여, 내년 청년회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역자들을 일으켜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다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박정수목사